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초공작전 (문단 편집) == 배경 == [[제1차 초공작전]]의 실패 이후, 장제스와 입법원장 [[후한민]]이 약법 제정을 놓고 갈등한 끝에 2월에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받은 광동파가 반장 세력에 합류하고 [[서산회의파]], 개조파, 광서파 등이 광동에서 결집하고 있었지만 [[장제스]]는 이와는 별개로 즉각 2차 초공작전을 결정하여 2월 10일 군정부장 [[허잉친]]에게 육해군총사령관 겸 난창행영주임 자리를 겸임하여 2차 초공작전의 총지휘관으로 삼았다. 1차 토벌전에 참여한 6로군, 9로군, 19로군을 보강하는 한편 호남에서 5로군, 산동에서 26로군의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총 11개 사단 11만 3천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지역 소비에트 토벌군까지 합치면 국민당의 병력은 17개 사단, 20만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중 절반 이상이 [[중원대전]] 중에 중앙군에 투항한 군벌군들을 개편한 부대로 북부 출신이라 강서성의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강서성의 공산당 근거지 영도를 목표로 설정하여 1차 초공작전의 전훈을 바탕으로 '보보위영, 온찰온타', '분진합격, 호상책응' 전술을 내세워 강서와 복건을 아우르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천천히 전진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홍군은 이념적으로 무장하고 마오쩌둥의 지시 아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반면, 국민당은 공산당을 여전히 비적떼 정도로 무시하고 그저 포위 공격에 홍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얕잡아보고 있었다. 강서성의 중국 공산당은 석성, 루이진까지 지배지를 확장하고 6만 6천 명으로 병력을 증강한 상태였는데[* 강서, 복건, 광동을 모두 합쳐선 12만 7천명으로 추정.][* 중국 공산당은 당시 홍군이 3만명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정부가 2차 초공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다. 1931년 1월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샹잉을 강서성에 파견하여 소비에트 구역 중앙국을 수립하고 샹잉을 대리 서기로 임명했다. 또한 강서성에 소비에트 구역 중앙국이 지도하는 중앙군사혁명위원회를 수립, 주석에 샹잉, [[주더]]가 부주석, [[마오쩌둥]]을 총정치부 주임으로 삼고 마오쩌둥의 홍군 제1방면군 총전선위원회를 폐지했으며 4월 당중앙위원회 6기 4차 전원회의 이후 런비스, 왕자샹, 구쭤린으로 구성된 중앙대표단을 파견하여 지도사업을 실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